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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한 실패작 <백치> | 2015-12-04 (원문링크)

영화평론가 정성일이 선택한 하라 세쓰코 최고의 작품


어느 자리에서 누군가 하라 세쓰코가 웃는 얼굴을 보고 있으면 부처님의 미소가 떠오른다고 말했다. 나는 그 표현이 이상할 정도로 절묘하다고 생각했다. 하라 세쓰코가 웃을 때는 기쁘다거나 즐겁다는 기분이 전혀 들지 않는다. 그냥 그 자리에서 이제까지 벌어진 일들을 고스란히 견디면서 그저 미소 하나로 무심하게 지나쳐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건 연기라기보다는 하라 세쓰코의 존재 그 자체처럼 여겨진다. 아마 오즈 야스지로도, 나루세 미키오도, 요시무라 고자부로도, 이마이 다다시도, 구로사와 아키라도 별다른 연기 지도 없이, 아니 차라리 하라 세쓰코 앞이라면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데, 속수무책으로 그저 그녀의 존재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고, 그렇게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카메라 앞에 세워놓고 바라보았을 것이라고 멋대로 상상해보고 싶어진다. 그러므로 원래 이 글은 하라 세쓰코의 가장 좋은 영화를 선정해 달라는 것이었는데, 밤새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가장 하라 세쓰코답지 않았던 영화를 말하는 것이 진심으로 그녀에게 올바른 헌사를 바치는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 영화는 구로사와 아키라의 <백치>다. 여기서 구로사와는 하라 세쓰코에게 (도스토옙스키 원작 속의) 나스따시야를 맡긴 다음 그녀에게서 요염하면서도 사악한 기운을 끌어내기 위해 무진 애를 쓴다. 물론 하라 세쓰코도 최선을 다한다. 하지만 어떻게 해도 하라 세쓰코라는 존재 자체가 가진 신비하리만큼 무심한 고요함과 맑은 기분이 모든 노력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백치>는 그런 의미에서 하라 세쓰코의 존재 자체를 기록하고 있는 소중한 실패작으로서의 위대한 다큐멘터리다. 그녀는 그런 배우였다. 그냥 거기 있으면 되는 존재. 아무도 대신할 수 없는 사람. 그러므로 하라 세쓰코의 부고 소식은 단지 슬프다거나 안타깝다기보다는 갑자기 마음속의 큰 빛 하나가 꺼져버린 것만 같은 기분이다. 여기서 감히 사요나라, 따위의 말을 해버리면 안 될 것만 같은 상황. 그저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용기를 내서 정말 오랜만에 다시 <백치>를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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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무면 (차이밍량,2015)

글:정성일(영화평론가) / 2015-12-04 (원문링크)


올해는 나에게 충만한 한 해였다. 무엇보다도 오랜 친구들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단지 영화를 보았다는 뜻이 아니라 정말 그 영화를 만든 사람들을 만났다는 뜻이다. 그리고 왕빙에 대한 다큐멘터리도 가까스로 완성할 수 있었다. 지난해와 달리 올해 나의 영화를 고르면서 순식간에 16편의 제목을 썼지만 규칙에 따라 아쉽게도 6편의 영화를 명단에서 제외시켜야 했다. 만일 내일 다시 고른다면 이 중 몇 편의 영화가 빠지고 그중 몇 편의 영화가 들어갈지도 모른다. 언제나 그렇지만 나는 이 명단을 만들기 위해서 어떤 배려도 하지 않았으면 어떤 균형도 잡을 생각이 없었다. 그냥 지금 떠오르는 대로 그저 내 두뇌 속의 스크린에서 상영되는 명단을 차례로 적어나갔다. 차라리 이 명단은 베스트 10이라고 부르는 대신 ‘나의 몹시 사적인 동시상영관’이라고 부르는 편이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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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0 출간예정인 "금정연, 『난폭한 독서: 서평가를 살린 위대한 이야기들』, 마음산책" 의 권말에 정성일 평론가의 추천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2015.11.10. 정성(일)을 다하는 글 (출판사 마음산책 공식블로그 링크)


11월 말 출간될 서평가 금정연 선생님의 책 추천사를 받고서 (좋은 의미의)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원고지 몇 장짜리 청탁이 마음만 내키면 100매로도 늘어난다던 소문은 그저 낭설인 줄만 알았지요. 뒤표지에 넣을 수 있는 글은 대략 원고지 1~3매. 그러나 그분의 추천사는 열 배인 27매가 되어 돌아왔습니다. ‘정성(일)’과 애정으로 빼곡한 27매! 해서, 권말에 아예 지면을 마련, 책을 더 묵직하게 만들기로 했지요.


"마음산책에서 만일 나를 편집자로 지목한다면 이 책의 표지로 주세페 아르침볼도의 그림 중 한 점을 골랐을지도 모르겠다" 잡지로 한국 현대 문화사를 읽는 『시대의 말 욕망의 문장』에서 전하길 “전문적인 시네필들도 숙독하기 어려웠던 월간지 <키노>의 이제 ‘레전드’가 되다시피 한 창간사”를 썼을 거라 짐작되는 그분, 영화평론가이자 감독으로서 숱한 시네필을 양산한 그분의 추천사를 일부 전합니다. 이 책은 대부분의 서평가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가려고 작정한 모험이다. 어떤 길? 보르헤스가 제목으로 썼던 길. 고다르가 이어받아서 <동풍Le Vent d’est>에서 했던 말. 두 개의 길. 이 책을 읽기 시작하면 당신은 종종 중얼거릴지 모르겠다. 마치 돈키호테가 된 기분인걸 곁에 있던 금정연은 자신을 산초 판사라 부르는 대신 내가 돈키호테다, 주장하며 당신이 탄 말을 빼앗으려 달려들 사람이다. 그렇게 이 책은 난폭한 책이다. 자신이 다루는 책들에 대해서 어떤 존경심도 표명하지 않는 독서. 하지만 금정연은 나를 맞받아칠 것이다. 하지만 난 이 책들을 몹시 사랑해요. 원래 그런 것이다. 사랑을 하게 되면 존경은 물러나는 법이다. 어떤 법? 존경하던 선생님과 사랑에 빠지면 반말을 하기 시작하는 법. 정확하게 그런 의미로 나는 이 책에서 사랑을 읽는다. 당신도 그럴 것이다. "금정연은 자신을 산초 판사라 부르는 대신 내가 돈키호테다, 주장하며 당신이 탄 말을 빼앗으려 달려들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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