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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느림 (글 링크)


느리다는 것은 무엇인가요? 혹시 당신께서 너무 빠른 것은 아닌가요? 차이밍량은 올해 1월 24일 오전 11시에 당신 영화에서 느림이란 무엇입니까, 라고 한 내 질문에 그렇게 반문했다. 사실 여기에 이미 모든 대답이 있다. 차이밍량은 이제 더 이상 영화작업을 하지 않겠습니다. 라고 선언한 다음 일련의 <걷는 사람(Walker)> 연작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 말은 조심스럽게 읽혀야 한다. 그가 영화 작업을 하지 않겠다는 것은 자본이 구경꺼리로 전락시킨 상업영화 배급 시스템을 거절하겠다는 뜻이다. 차이밍량은 영화를 포기하지 않았다. 차라리 영화의 존재론에 더 가깝게 다가가고 싶어 했다. 그때 그가 선택한 전술은 자신의 (사랑하는) 배우 이강생에게 당나라 승려의 복장을 입힌 다음 그저 길에 나가서 걸어가는 것이 전부였다. 이강생은 연작에서 온 세상을 걸었다. 홍콩의 침사추이 거리를 걸었고, 지구 반대편의 마르세이유의 거리를 걸었고, 물이 흥건하게 고인 무대 위를 걸었고, 한자가 쓰인 무대만큼 큰 종이 위를 걸었다. 이때 이강생은 천천히 걸었다. 그걸 슬로우 모션이라고 부르고 싶을 만큼 천천히 걸었다. 거의 멈추어버릴 것만 같은 발걸음. 영문을 모르는 거리의 사람들은 그를 스쳐 지나갔고, 때로 흘낏 쳐다보았고, 영화를 보는 우리도 그저 물끄러미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다. (후략)

+. twitter로 임준혁님이 제보해주신 글입니다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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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가을.Vol11. [PDF링크]

기억의 거짓말, 당신에게 건네는 하나의 질문 (네이버 공식블로그 글 링크)


처음에는 다소 방심했다. 무심코 메일을 열었고 원고 청탁서를 확인했다. 나를 당황시킨 것은 이번 호의 주제였다. 아아, 시간과 인간이라니. 나는 약간 비명을 지르는 심정이 되었다. 이건 하이데거(를 연구하는 철학과 학생이)나 쓸 수 있는 청탁이 아닌가요. 며칠을 전전긍긍하다시피 했다. 나는 여기서 잠시 슬라보예 지젝이 키에르케고르의 죽음의 인접성에 관한 논제를 다루면서 참을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다섯 가지 단계를 흉내내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 제일 먼저 부정하는 것이다. 시간은 무슨? 어차피 보이지도 않는 걸. 그런 다음 분노를 터트린다. 제기랄, 얼마나 무시무시한 곤경에 빠져있는가! 하이데거조차 《존재와 시간》을 완성하지 못했는데. 그리고 타협으로 이어진다. 좋아, 하지만 본론은 철학자들이나 쓰라구. 난 영화와 시간에 대해서만 떠들면 되니까. 그런 다음 우울증에 빠진다. 어차피 영화는 상영시간 동안 보는 거잖아, 그러니 내가 그걸 설명하지 않을 도리가 없잖아. 마침내는 청탁을 받아들인다.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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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분야에 속한 스무명 필진의 글을 묶어 "연애소설이 필요한 시간"(북키)이라는 책으로 발간되었습니다. 정성일 감독/평론가는 "다 끝났지만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 글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백야』 두 권의 책을 다루고 있습니다.


[책소개] 

연애의 끄트머리에서 건조해진 마음을 순도 높은 사랑 이야기에 푹 담그고 싶을 때, 우리는 연애소설을 찾게 된다. 그렇다. 연애소설이 필요한 시간이란 건 언제나 연애가 끝났을 때 시작된다. 싱어송라이터 요조, 영화평론가 정성일, 시인 황인찬, 소설가 김중혁, 기생충학 박사 서민, 만화가 김보통 등 완전히 다른 일을 하며 살고 있는 스무 명의 남자와 여자. 이들 앞에 '연애소설이 필요한 시간'이라는 제목만 쓰인 빈 종이가 놓여졌다. 이들은 과연 어떤 이야기를 써 내려갔을까?


스무 명의 필자는 '읽기'라는 '만남'을 통해 자신들과 지극히 사적인 관계를 맺은, 그래서 완전히 새롭게 보이는 연애소설들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다. '책꽂이에 꽂지 않고 서랍 속에 넣어 둔, 연애가 끝나고 나 혼자만 읽고 싶었던 이야기'다. 그들이 했던 연애, 그들이 읽은 소설, 그리고 그들이 필요했던 시간에 대한 이야기다.


[목차]

연애는 하는 것

Pour mon 'CŒUR' _ 요조/ 「야행」

눈썹 _ 김보통/ 『속 깊은 이성 친구』

잠들지 않은 꿈 때문일까 _ 박현주/ 『채굴장으로』 「마츠 이스라엘손의 이야기」

사드와 나 _ 정지돈/ 『몰타의 매』 『독보건곤』 『규방철학』

둘 다 같은 일 _ 김소연/ 『요오꼬, 아내와의 칩거』

고르고 또 고르자 _ 서민/ 『사랑이 달린다』 『사랑이 채우다』


소설은 읽는 것

절도 _ 황인찬 / 『독학자』

가스등이 어두워질 때 _ 이도우/ 『워싱턴 스퀘어』

부서져라 아린 남성의 사랑 _ 백민석/ 「철도원」외 2편

가장 어려운 예술은 사랑이니까 _ 김민정/ 『눈』

사랑의 시대 _ 박준/ 『상실의 시대』

나는 너무 쉽게 사랑에 빠진다 _ 김중혁/ 「세 번째이자 마지막 대륙」

번역 불가능한 Love의 세계 _ 안은별/ 『산시로』

잃어버린 기회의 이야기들 _ 김종관/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

무모하게 사랑할 특권 _ 배명훈/ 『데브다스』


시간은 필요한 것

다 끝났지만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 _ 정성일/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백야』

내가 산 것 _ 금정연/ 『신들은 바다로 떠났다』 「안 그러면 아비규환」

연애소설 애호가를 애호하는 이유 _ 정세랑/ 『제인 오스틴 북 클럽』 『시라노』

아수라 걸 in Love _ 박솔뫼/ 『아수라 걸』

비극도 희극도 못 되는 그저 그런 이야기를 추억하며 _ 주영준/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



[ 부키 홈페이지 (책소개 링크) ]

(중략) 영화감독 정성일은 첫 영화를 만들게 됐을 때, 자신이 중학교 2학년 때 읽었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뽑아 들었다. 그는 그 소설을 좋아하지 않았다, 가장 아름다운 구절을 읊고 자신의 관자놀이에 권총을 쏜 베르테르. 머리를 관통한 총알 때문에 뇌수가 밖으로 터져 나와 있었고 숨을 간신히 쉬고 있는 베르테르를 보며 그는 거의 숨을 쉴 수 없었다. 마치 자신이 총에 맞은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 후 알 수 없는 우울함에 빠졌고, 좋아하던 여학생과 마주치고 싶지 않아 학원도 나가지 않았다. 모두 그 소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다시 그 소설과 대면할 시간이 되었음을 느꼈다. 정성일은 그 책을 펴 놓고 각색을 해 나갔다.


소설이 모두 끝났는데도 영화에는 무언가 더 해야 할 일이 남았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베르테르가 나에게 호소하는 가냘픈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죽을 운명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요. 나도 잘 알아요. 하지만 잠시만이라도 조금만 더 제 숨결을 남겨놓아 주세요. 하지만 그걸 어떻게요. 그걸 제가 감히 어떻게 할 수 있겠어요. 베르테르가 내게 말했다. 도움을 청하세요. 세상에는 연애소설이 그렇게도 많은데 당신을 도와줄 이가 한 명 없을 리가 없잖아요. 나는 책장을 뒤지기 시작했다. 괴테가 저지른 저 무자비한 결정, 저 결정을 바꿀 수는 없겠지만 잠시라도 미룰 수는 없는 것일까. 나는 찾고 또 찾아야만 했다. -정성일 「다 끝났지만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 중에서


그는 ‘읽기’라는 만남을 통해 소설과 ‘사적인 관계’를 맺은 것이다. 그것은 새로운 방식의 ‘연애’였다. 물론 그렇게 연애가 시작되는 계기는 제각각일 것이다. 등장인물일 수도 있고 배경일 수도 있다. 이야기의 전체 흐름일 수도 있고 세부적인 장면일 수도 있다. 아름다운 묘사 한 줄일 수도 있다. 설명하기 힘든 미묘한 분위기일 수도 있다.(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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